9살 때 홋카이도 아사히카와(旭川)에서 잡화상을 하던 숙부에게 양자 입양됐다. 하코네 중학교에 다니던 중 도화 선생의 감화를 받아 화가의 길을 지망했다. 1905년 상경해 백마회(白馬會) 양화연구소에 들어가 기초를 익히는 한편 이곳에서 평생의 친구가 된 나카무리 쓰네(中村彝)를 만났다. 이후 태평양화회(太平洋畵會) 연구소로 옮겨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 미츠타니 구니시로(滿谷国四郞) 등에 사사했다. 또 이곳에서 프랑스에서 귀국한 조각가 오기와라 모리에(荻原守衛, 또는 로쿠잔(碌山))를 만났으며 그를 통해 당시 예술가 후원자로 이름난 신주쿠야(新宿屋)의 소마(相馬) 부부를 알게 됐다. 1910년 로쿠잔이 급사한 것이 계기가 돼 조각가가 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태평양화회 연구소 조각부에 있던 신카이 다케타로(新海竹太郞)의 지도를 받으며 곧바로 재능을 발휘, 그해 열린 문전에 <노인>을 출품해 입선했다. 1912년 시라카바파(白樺派)가 개최한 미술전에서 로댕 작품을 처음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이후 대담하게 단순화시킨 형태 속에 생명감을 표현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작업과는 별개로 가난에 시달리며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린 것인 원인이 돼 폐렴에 걸렸고 이것이 악화되면서 결국 32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70년 조각계의 아쿠타가와상(芥川賞)으로 불리는 나카하라 데지로상이 제정됐으며 1994년에는 그가 자란 아사히카와 시에 아사히카와시 조각미술관이 설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