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목면 도매상의 5남 출신. 15살때 화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을 정한 뒤 상업 학교를 중퇴하고 교토 성호원(聖護院) 서양화연구소에 들어가 아사이 추(浅井忠)와 가노코기 다케시로(鹿子木孟郎)에 사사했다. 이들의 인연은 연구소가 간사이(關西) 미술원과 합병된 이후에도 이어졌고 이곳에서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인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를 만났다.
1907년 선배 쓰다 세이후(津田靑楓)과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가노코기의 소개 대로 아케데미 줄리앙에 들어가 장-폴 로랑스에게 목탄 데생 등을 새로 배웠다. 유학 초기에는 밀레와 파사로에 경도됐으며 특히 야외 사생에 치중했다. 이후 세잔을 새로 알게 되었고 세잔식의 단순한 색면 구성을 통해서도 대상의 적확한 묘사 가능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과 때를 같이 해 건강이 나빠지면서 7년에 걸친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이듬해인 1915년, 제2회 이과전(二科展)에 유학 중에 그린 작품을 발표해 큰 화제를 모으며 화려하게 화단 데뷔를 했다. 이후 일본적 자연과 소재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루는 데 대해 고민하면서 한동안 슬럼프를 겪기도 했으나 1929년 <좌상>을 발표하면서 선명한 색채와 자연스런 선묘로 일본적 소재를 생기있게 표현해 내는데 성공하며 새삼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이후 일본적 양화 세계이 구축이란 목표로 주로 초상화와 풍경화 작업에 몰두했다. 풍경화로는 지바현 보소(房総)반도와 홋카이도의 풍경을 강한 색과 선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유명하다. 1930년대와 40년대 화단의 중진으로서 우메하라와 나란히 ‘우메하라 야스이 시대’를 구사했다. 1935년 제국미술원이 됐으며 1946년에는 일본미술가연맹 초대회장으로 뽑혔다. 작고 이듬해 열린 유작전에는 당시로는 공전의 인파인 12만 명이 다녀가면서 이때 얻은 수익금으로 1957년 청년 화가의 등용문인 ‘야스이 상’이 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