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일본화가. 일본화와 서양화의 융합을 모색한 혁신 운동의 대표적 화가다. 고향은 니가타현 사도(佐島). 본명은 긴지(金二).
사도 섬의 농가 출신으로 16살 때 중이 되기 위해 교토로 나와 다케우치 세이호(竹內栖鳳)의 문하에 들어갔다. 1909년 새로 생긴 교토회화전문학교에 다케우치 화숙의 동문 오노 짓코(小野竹喬)와 함께 입학했다. 재학 중 미술사가이자 평론가가 된 다나카 기사쿠(田中喜作)와 교류하며 그가 만든 「흑묘회」「가면회」 등에 가입해 활동했다. 졸업 후 오노 짓코, 무라카기 가카쿠(村上華岳) 등과 국화(國畵)창작협회를 결성, 첫번째 전시에 <유나(湯女)>를 출품에 주목을 받았다. 1921년 오노 짓코, 노나가세 반카(野長瀨晩花), 서양화가 구로다 주타로(黑田重太郞)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아울러 르누아르, 세잔 등의 작품도 직접 구입했다.(세잔 작품은 현재 오하라(大原)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후 일본화 형식을 유지하면서 서양화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새로운 모색을 계속 시도했다. 1927년 발표한 <오하라메(大原女)>는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평면성 문제를 자기식으로 해석한 점에서 큰 화제가 됐다. 이후 제전(帝展)을 중심으로 사실적 표현미와 공예적 장식미를 결합한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1935년 조선을 여행하며 <기생의 집>을 남기기도 했다. 1939년 암으로 교토에서 사망했다. 192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를 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