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가로 파리에 건너가 에콜 드 파리에서 활동하며 국제적 명성을 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로 귀화했으며 프랑스 이름은 레오나르 후지타(Leonard Foujita)다. 도쿄 출신.
아버지는 도쿄대 의학부 출신의 군의(軍醫)로 조선, 대만 등지의 근무를 거쳐 군의총감(중장)까지 올랐다.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신인 화가로 활동하던 중 부친의 친구이자 군의감 출신의 소설가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조언으로 1913년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서는 몽파르나스에 살면서 그곳의 모딜리아니와 수틴을 사귀게 되었고 이들을 통해 훗날 에콜 드 파리의 주역이 되는 피카소, 자드킨, 키슬링, 장 콕토 등과 교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백색 피부 위에 섬세한 필치로 여인상, 나부상을 그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이들 작품은 1919년 열린 살롱 도톤에 6점을 출품돼 모두 입선하면서 일약 화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후 인기화가로 파리와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머물며 군부의 의뢰를 받아 다수의 전쟁 기념화를 그렸다. 이들 그림은 나중에 전쟁협력자라는 비난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1949년 ‘일본 화단도 국제적인 수준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건너가 1955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59년에 가톨릭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이후 그리스도교와 성모를 소재로 한 그림도 다수 그렸다. 196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자신이 설계하고 벽화를 그린 랭스의 후지타 예배당에 묻혔다. 사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장(瑞寶章)이 추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