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大正) 시대에 많은 미인도를 그려 '무네지 미인(夢二美人)'이란 유행어를 만들었으며 표지, 삽화 등의 적극적인 제작으로 '다이쇼의 우키요에(浮世繪) 화가'로도 불렸다. 본가는 대대로 양조업을 경영했으나 부친이 제철소에 취직하면서 후쿠오카에 이주해 살았다. 17살에 단신 상경해 와세다 실업학교에 들어갔다. 인력거꾼,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신문과 잡지에 삽화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1905년 학교를 중퇴하고 본격적인 삽화 작가로 활동했으며 이 무렵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이들이 창간한 『평민신문』에 삽화를 그렸다. 1907년에 요미우리 신문사에 입사해 시사 스케치를 담당했다. 이후 심해진 여성 편력과 함께 방랑과 표박의 생활을 반복했으며 그 가운데 일본화, 유화, 수채화, 판화, 시, 소설 등의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30년에는 2년 반에 걸쳐 미국, 파리, 빈 등지를 여행했다. 귀국 후 심해진 결핵과 만주 사변으로 인한 전시체제로 인해 새로운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결국 1934년 나가노현 후지미(富士見)고원요양소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