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근대 조각가. 도쿄 출신. 부친은 불상제작자이자 목조각가인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
어려서부터 조각에 익숙한 환경에서 성장해 부친이 교수로 있던 도쿄미술학교에 14살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문학에 관심을 보여 요사노 뎃칸(与謝野鉄幹)이 주재하는 동인지 『명성(明星)』에 시를 기고했다. 조각과를 졸업한 뒤 부친의 기대와는 달리 서양화과에 재입학했다. 1906년부터 3년간 뉴욕, 런던, 파리에 체류하며 서양미술과 조각을 견문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조각가 거트즌 보그럼을 만나 한때 조수로 활동했다. 보그럼은 나중에 러시모어에 미국 대통령의 거대한 얼굴상을 조각한 작가다. 파리에서는 오기와라 모리에(荻原守衛) 등과 교류하며 로댕을 직접 만나 근대 조각의 감화를 받았다. 1909년 귀국한 뒤에는 부친에 반항해 도쿄미술학교 교수직을 거부하고 문학작품 발표와 미술평론 활동을 폈다. 이때 일본 최초의 포비즘 선언이 된 논문 「녹색의 태양」을 『스바루』지에 발표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간다에 일본 최초의 화랑인 낭간동(瑯玕洞)을 오픈했고 이듬해에는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요로즈 데츠고로(萬鐵五郞) 등과 함께 <퓨전회>를 결성해 유화와 조각 작품을 발표했다. 또 시집 『도정(道程)』을 출판했다. 전쟁 중에는 태평양 전쟁을 성전으로 부르며 많은 전쟁 협력시와 애국시를 발표했으나 이후 전쟁이 격심해지면서 아틀리에가 불타는 바람에 많은 작품을 잃었다. 전쟁 이후에는 전쟁협력 책임을 의식하며 이와테의 하나마키(花卷) 교외에 홀로 생활하며 작품만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