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적 모더니즘 정신을 일본화에 시도, 모색한 화가로 손꼽힌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8살 때 상경했다. 중학교 재학중에 백마회 회화연구소를 다니기 시작했고 1914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제9회 문전에 <만춘>을 출품해 이등상 수석이 차지했다. 또 이과전(二科展)에도 입선했으나 1918년 서양화과를 중퇴하고 시험을 다시 치뤄 일본화과에 재입학했다. 이유는 형의 사업 실패로 유럽 유학이 좌절된 때문이라고도 전한다. 나라 가스가다이샤(春日大社)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병행해 1923년 일본화과를 수석 졸업했다. 이어 지도교수 마쓰오카 에이큐(松岡映丘)가 이끄는 신흥야마토에회(新興大和繪会)에 가입했다. 신흥야마토에회는 전통채색화인 야마토에의 부흥을 목표로 한 모임으로 이후 그의 그림은 이 이념이 기본이 됐다. 제7회 제전(帝展,제국미술원 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구마노 나치의 산들(三熊野の那智の御山)>이 특선하며 일약 주목을 받았다. 1929년 제국미술학교가 창설되면서 교수로 초빙됐다. 제국미술원전람회의 개편문제로 스승과 결별하고 후쿠다 헤하치로(福田平八郞), 나카무라 가쿠료(中村岳陵), 마키노 도라오(牧野虎雄), 나카가와 기겐(中川紀元), 기무라 쇼하치(木村荘八), 요코가와 기이치로(橫川毅一郞), 도가리 소신안(外狩素心庵) 등과 함께 육조회(六潮会)를 결성, 자유로운 활동을 펼쳤다. 1932년에는 조선을 여행하며 <시장>을 그렸다. 전쟁화 제작은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1942년 육군성 의뢰로 사이공, 홍콩, 광동에 파견돼 전쟁기록화 <홍콩섬 최후의 총공격도> 등을 그리기도 했다. 1950년 일본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1965년 문화훈장을 수장했고 문화공로자로 선정됐다. 1969년 일전 고문으로 추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