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집안의 11형제 중 5번째로 태어나 10살 때 아사쿠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중학시험 낙방 후 조각가로 활동중이던 실형(實兄) 와타나베 나가오(渡辺長男)를 찾아 상경, 이듬해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우에노 동물원을 다니며 습작을 거듭한 것이 계기가 돼 교수의 추천으로 수출용 동물장식품을 제작했다. 장식용 조각은 졸업할 때까지 1,200개를 제작했고 졸업직후 아틀리에를 자비로 마련할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 또 이 무렵 해군성이 주최한 동상 공모에 1등으로 뽑혀 주목을 받았다. 졸업 이듬해에 열린 제2회 문전에 는 <어둠(闇)>이 최고상인 2등상을 차지하며 일약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10년에는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묘지기(墓守)>를 발표했고 이 해 친구 오기와라 록쿠잔(荻原碌山) 죽음 등에 충격을 받아 싱가폴, 보르네요 등지로 여행을 떠났다. 귀국후 문전에서 연속 입상하며 제10회 문전에는 34살의 나이로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발탁됐다. 1921년에 도쿄미술학교 교수로 취임했으며 1923년에는 관동대지진으로 400여점의 파편으로 부셔진 도쿄미술학교 소장의 로댕작 <청동시대>의 복원작업을 맡았다. 이 일로 이후 동양의 로댕으로 불렸다. 1924년 제국미술원 회원이 됐으며 1926년부터 자택 아틀리에를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재건축해 아사쿠라 조각숙(彫刻塾)을 열었다.(이는 현재 아사쿠라 조각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37년 제국예술원 회원이 됏다. 1944년에는 제국 기예원(技藝員)이 되었고 종3위 훈4등서보장(瑞宝章)을 수장했다. 전쟁 중에 금속 공출로 작품 400여 점이 소멸됐으나 다행히 원형 300여점은 남았다. 전후에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자로 선정됐으며 일전(日展) 상무이사, 고문 등을 역임하며 일반에게 성공한 조각가로 인식되며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