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 힘든 소년 시대를 보냈다. 그림은 13살 때 지역화가 아오키 고하(靑木香葩)에게 처음 배웠다. 16살 때 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상경해 일본화가 가지타 한코(梶田半古)의 화숙에 들어갔다. 고케이는 이때 지어 받은 호다. 이어서 이곳에 마에다 세돈(前田靑邨)과 오쿠무라 도규(奧村土牛)가 입문해 이들과 평생 친교를 나누었다. 한코 화숙이 패쇄된 뒤 야스다 유키히코(安田靫彦), 이소다 조슈(磯田長秋),고야마 에이타쓰(小山栄達) 등이 중심이 된 역사화 그룹 <자홍회(紫紅会)>(나중에 홍아회(紅兒会)로 이름을 바꿨다)에 가입했다. 1921년 제8회 원전(院展)에 <앵속(罌粟)>을 발표해 큰 호평을 받으며 당시 홍아회의 패트런이었던 실업가 하라 산케이(原三溪)의 후원을 받게 됐다. 1922년 마에다 세돈과 함께 일본미술원 유학생 자격으로 유럽 유학길에 올랐다. 다음 해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고개지의 <여사잠도>를 모사하며 동양의 선의 예술에 새삼 눈떴다. 이후 그린 <머릿결>은 고케이 선묘의 특색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일본 최초로 우표 디자인에 쓰이기도 했다. 1935년 제국미술원 회원이 됐고 1944년 도쿄미술학교 교수에 취임했다. 1950년 문화훈장을 수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