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한의사 집안 출신. 도중에 서양의학을 공부해 나가노현 산간마을에 개업했다. 소설가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부친 모리 시즈오(森靜男)의 병원에 서양의학을 수련한 인연으로 어려서부터 모리 오가이와 그 주변의 화가들을 알게 됐다. 아버지의 수련 시절 가난한 생활 속에 소학교를 마치고 목판화 공방에 들어가 입주 고용살이를 시작했다. 7년간 공방에서 생활하며 서양 목판화기법인 우드 인그레이빙 기법을 익혀 판화 기술자로 독립했다. 이때 판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를 알게 돼 평생 친교를 나눴다. 190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해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재학 중인 1904년 문예잡지 『명성(明星)』에 목판화 <어부>를 발표한 것이 호평을 받으며 신예 판화가로 이름이 알려졌다. 졸업 후 이시이 하쿠테이, 모리타 쓰네토모(森田恒友) 등과 미술문예지 『방촌(方寸)』을 창간, 창작판화의 보급에 힘썼다. 이 잡지는 자금난을 겪는 가운데에도 1911년까지 35책을 발행했다. 1908년에 『방촌』을 모체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신의 이름을 딴 ‘판 회’를 결성해 판화와 삽화 등 문인들과 공동작업을 펼쳤다. 1912년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파리로 건너가 에콜 드 보자르의 판화과에 들어갔으나 이후 곧 그만두고 서양화에 몰두했다. 파리에서 소설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을 만나 사귀며 그가 쓴 소설 『신생(新生)』의 화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16년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했다. 여행비 마련을 위해 모스크바 영사관에서 일할 당시 모스크바 남쪽의 야스나야 폴리나로 톨스토이를 방문해 그로부터 농촌미술과 어린이의 미술교육에 관한 얘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귀국해 아동 미술 보급과 농민 미술 등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미술연구소까지 세워 활동했다. 화가로서는 귀국 직후부터 일본미술원의 원전(院展) 양화부 동인이 돼 활동했다. 한편 1918년에 도바리 고간(戸張孤雁)과 함께 일본창작판화협회를 설립해 일본화, 서양화에 뒤지지 않는 판화의 독자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기타하라 요시오(北原義雄)과 함께 미술잡지 『아틀리에』를 창간했다. 『아틀리에』는 참신한 지면에 회화기법 해설과 외국미술소개 등에 힘을 기울이며 전쟁 이전에 『미즈에』와 함께 대표적인 월간종합 미술잡지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