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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이 하쿠테이 [ 石井柏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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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1882-1958
한자
石井柏亭
이름
いしい はくてい Hakutei Ishii
근대 서양화가, 수채화가, 판화가, 미술비평가. 본명은 미쓰요시(滿吉). 도쿄 출신.
화가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 스즈키 가코(鈴木鵞湖)는 에도 말기의 화가였다. 부친 이시이 데코(石井湖) 역시 일본화가며 동생 쓰루조(鶴三)는 조각가. 부친의 지도로 그림을 익혀 11살 때부터 하쿠데이라는 호로 일본미술협회와 청년회화공진회 등에 출품했다. 이후 집안이 기울어지자 중학을 중퇴하고 인쇄국의 조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서양화 데생을 배웠으며 1897년 아사히 추(淺井忠) 문하에 들어가 유화를 익혔다. 이 무렵 일본화에도 관심을 보여 1900년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히라후쿠 햐쿠스이(平福百穗) 등이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결성한 무성회(无聲會)에 들어가 신일본화 운동에 참가했다. 또 서양화가 나카무라 후세쓰(中村不折)에게도 사사했으며 1902년에는 새로 결성된 태평양회에 참여했다. 1904년 도쿄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했으나 병으로 중퇴하고 당시 요사노 뎃칸, 쇼코(、与謝野鉄幹, 晶子) 부부 등이 창간한 월간문예지 『명성(明星)』의 삽화를 그리며 한편으로 시작(詩作)을 하는 생활했다. 이해 문예 성격이 강한 미술잡지 『방촌(方寸)』을 야마모토 가나에(山本鼎), 모리타 쓰네토모(森田恒友) 등과 함께 창간했다. 또 탐미파 문학운동인 '판회’(판은 그리스 신화의 목신 Pan을 뜻한다) 설립에도 참가해 이를 통해 우키요에 판화의 재발견 작업을 함께 펼쳤다.
그 사이 당시 유행하던 수채화 붐에도 관여, 수채화가로도 활동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1910년에서 12년까지 2년 동안 와타나베(渡辺) 은행의 후원으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귀국 후에 일본수채화회 창립에 관여했으며 1914년에는 아리시마 이쿠마(有島生馬), 쓰다 세후(津田靑楓) 등과 함께 이과회(二科會)를 창설했다. 다음 해에 미술잡지 『중앙미술』을 창간하고 편집을 맡았다.
1921년에는 니시무라 이사쿠(西村伊作), 요사노 뎃칸, 쇼코 부부와 함께 문화학원을 설립했다. 문화학원에서는 미술부장을 맡았다. 1924년부터 2년간 재차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제10회를 맞게 된 이과회 전시에 마티스, 피카소, 뒤피, 드랭, 브라크 등의 작품을 보내 전시하게 했다. 또 1923년에는 살롱 도톤에 일본부를 만들어 『방촌』 동인과 이과회 회원 작품을 소개했다. 이해 자신도 일본에서 가져온 작품과 현지 제작한 작품 등으로 마르셀 베른하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28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드뇌르 훈장을 수장했으며 1935년 제국미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때 이과회를 탈퇴했다. 전쟁 이후에는 일전(日展)운영회 이사로 활동했다.

<풀밭위의 휴식>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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