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20살 나이로 미국에 유학, 데생과 서양화를 수학했다.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역시 유학중이던 오기하라 모리에(荻原守衛)과 교우를 맺었다. 1906년 결핵으로 학교 중퇴하고 귀국했으며 귀국 후에는 데상 실력을 발휘해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와 도쿠토미 로카(徳冨蘆花) 같은 문인들의 책에 삽화를 그렸다. 당시 우키요에 풍의 삽화와 달리 짙은 음영을 넣은 서양화풍 삽화는 큰 관심을 끌었고 그에 따라 1908년에 『고간(孤雁) 삽화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오기하라의 소개로 서양화가 나카무라 쓰네(中村彝)와 조각가 나카하라 데지로(中原悌二郎) 등과 교류하며 이들을 후원하고 있던 신주쿠 나카무라야(中村屋) 주인 소마 아이조(相馬愛藏) 부부를 알게도 이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이전부터 조각을 가르쳐주던 오기하라가 1901년 급사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조각작업을 시작했다. 이 무렵 수채화와 판화 작업도 시작했으며 특히 판화는 1919년 야마모토 가나에(山本鼎)와 함께 일본창작판화협회의 설립 주역으로 활동했다. 1922년에는 일본 최초의 판화기법서인 『창작판화와 판화제작법』을 출판했다. 판화 작업은 <공굴리기> 연작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대표작으로 인상지워졌다. 다이쇼 시대의 조각과 창작판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그는 폐결핵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강행하다 병이 악화돼 192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