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는 구라시키(倉敷)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그의 집안은 그곳에서 여관을 경영했다. 1901년 상경해 다음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부터 구라시키 부호로 구라시키 방적을 창업한 오하라(大原) 집안의 장학생이 됐다. 나중에 오하라 방적의 2대 사장이 된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는 그보다 1살 위로 이때부터 서로 친교를 나누며 평생 그를 후원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미술학교를 2년만에 졸업한 그는 부설 연구소에 들어갔다. 연구소 시절인 1907년 도쿄권업박람회에 <애정의 정원> <고향의 물레방아>를 출품해 나란히 1등상을 수상해 일약 각광을 받았다. <애정의 정원>은 구라시키 출신의 사회사업가 이시이 주지(石井十次)가 세운 오카야마 고아원을 그린 것으로 당시 황후의 눈에 들면서 궁내청이 구입했다. 마고사부로는 이를 기뻐하면서 그에게 유럽 유학을 권했고 스승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가 파리의 로랑을 소개해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파리의 도시 생활이 맞지 않아 벨기에로 옮겨 겐트 시립미술학교에 입학해 1912년에 이곳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벨기에 시절 점묘를 중심으로 한 인상화 화풍을 익혔으며 벨기에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귀국 후 마고사부로의 주선으로 이시이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가 내준 별장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도쿄, 오사카 등지 개인전을 여는 등의 작가 활동을 했다. 1919년 마고사부로의 권유로 두 번째로 유럽에 건너가게 되자 일본의 서양화 지망생을 위한 당대 서양화의 수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해 그로부터 수집 승낙을 얻어냈다. 파리에서 모네, 마티스 등의 아틀리에를 직접 방문해 20여점의 작품을 구득했고 이들은 귀국후 구라시키 여학교에서 일반에 공개되며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1922년 세 번째로 유럽에 건너가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수집했으며 이때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를 포함해 밀레, 고갱, 샤반느, 모로, 르동, 로댕 등의 작품을 구입했다. 이들은 1930년 설립된 오하라 미술관에 주요 컬렉션이 됐다. 그는 1924년 황실로부터 벽화 제작을 의뢰받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과로 등이 겹쳐 미술관이 설립되는 바로 전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