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 뿐만 아니라 일본화 그리고 도안까지 폭넓은 장르에서 활동했다. 교토의 꽃꽂이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후 교토 포목도매상 지키리야(千切屋)의 사환으로 들어가 일하면 도안을 배웠다. 이 무렵 시조파(四条派) 화가에게 처음 일본화를 배웠고 1897년 교토시립 염직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도 일본화가 다니구치 고쿄(谷口香嶠)에 사사했다. 1899년에 간사이미술원에 입학해 아사이 추(浅井忠)와 가노코기 다케시(鹿子木孟郎)에게 처음 서양화를 배웠다. 이 무렵 교토 다카시마야 백화점과 미술출판사 운소도(芸艸堂)의 도안 직원으로 일하며 도안집을 펴내기도 했다. 1907년 간사이미술원 동문인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郎)와 함께 농상무성 해외실업 연습생에 선발돼 유럽에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줄리앙을 다녔다. 귀국 후에는 아사히신문 삽화를 그리며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木漱石)을 알게 됐다. 1911년 제5회 문전에 입선하면서 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14년에 문전의 제2부(양화부문)을 신구(新舊) 2과로 나누는 건의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야단체로 이과회(二科會)를 결성하는데 앞장섰다. 관동대지진 이후 교토로 돌아와 교토 대학의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와 교류하기 시작하며 프롤레타리아 미술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비합법 활동의 이유로 체포된 뒤 전향서를 내고 석방되었으며 이때 이과회를 탈퇴했다. 종전 이후에는 일본화와 서예에 몰두했다. 특히 에도 후기의 승려이자 서예가로 유명한 료칸(良寬) 연구자로 이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