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1920-1976)은 20세기 한국화단에 선구적 자취를 남긴 여성 미술가로서, 판화와 태피스트리를 넘나들며 기존 동양화의 관습을 타파해 나갔다. 하지만 오십 대에 갑자기 타계한 뒤 그의 예술은 점차 잊혔고 오랫동안 운보 김기창의 아내로서만 기억되었다.
박래현은 여성 미술가가 드물던 시절에 육아와 가사에 쫓기면서도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예술의 소재를 찾고, 가사 노동에서 요구되는 수공(手工)을 응용해 작품의 표현 기법을 확장시켰으며, 여성, 어머니,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토대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완성하였다.
이번 전시는 여성에게 요구된 역할을 수용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종국에는 성공적인 예술가로 자리매김한 우향(雨鄕) 박래현의 삶과 예술을 소개한다. 청각 장애를 가진 남편 김기창을 위한 영어·한국어·구어(口語)의 삼중통역자이자, 회화·태피스트리·판화의 삼중통역을 시도했던 예술가 박래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