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정치가이자 서예가. 자는 등선(登善). 전당(錢塘, 지금의 항주 전당(杭州錢塘) 출신.
부친 저량(褚亮)은 진왕 이세민이 세운 문학관(文學館)에서 활동한 18학사 중 한 사람이다. 초기에 우세남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만년에 종요(鐘繇),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취했다. 우세남, 구양순, 설직과 함께 초당4대가로 불린다. 정관10년(636)에 비서랑을 거쳐 기거랑(起居郎)에 이르렀으며 태종에게 위징을 천거하기도 했다. 이후 황문시랑(黃門侍郎)에 올랐으나 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반대하기도 했다. 태종의 임종때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후사를 돌보았으며 고종 즉위이후 황후 간택에 반대하다 좌천되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해서는 <맹법사비(孟法師碑)>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 <방현령비(房玄齡碑)>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등이 있다. 그외 남송 모본으로 전하는 <예관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