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 양(梁)의 문인, 서예가이며 도교 도사로 모산파(茅山派)의 개조. 자는 통명(通明), 은거 후에는 이름을 버리고 화양은거(華陽隱居)라는 호를 썼다. 단양 말능(丹陽秣陵, 지금의 강소성 남경江蘇省南京) 출신.
강동의 명문집안 출신으로 도륭(陶隆)의 손자이며 도정보(陶貞寶)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서법을 깨쳤으며 만권의 책을 읽었다. 20살 무렵에 남제(南齊)의 고제(高帝)에게 초빙돼 좌위전중장군(左衛殿中將軍)에 임명됐다. 이후 여러 제왕의 시강(侍講)역을 역임했다. 36살 이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구곡산(句曲山)에 들어가 은거했다. 그는 양무제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았으나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마다 양무제는 사신을 보내 그의 의견을 들었다. 이로 인해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 불렀다. 글씨는 왕희지와 종요를 법으로 삼았다. 특히 왕희지 글씨를 최고로 삼는 평가는 도홍경부터 시작됐다. 그의 서법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북송의 황정견이 심취했다. <예학명(瘞鶴銘)>은 그의 글씨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