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시찰하였다. 그 후 이용사당상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성균관대사성·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도승지·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등을 지냈다. 1887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CLEVELAND S. G.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등 자주외교를 펼쳤다. 청나라의 압력으로 1889년 귀국한 뒤 전환국관리, 호조판서, 교정청당상 등을 지냈다. 갑오개혁 때에는 군국기무처회의원, 학무대신, 내각총리대신, 내부대신 등을 맡으면서 친미 반일세력인 정동파貞洞派의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후 내부대신, 총리대신서리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1898년 의정서리로 만민공동회에 참석해 시정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뒤 양지아문총재관, 탁지부대신, 중추원의장을 역임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병으로 운명하였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 인사들을 지원하였다.
편저로는 《죽천고竹泉稿》, 《미속습유美俗拾遺》, 《일본내무성시찰기日本內務省視察記》 등이 있다.
발행일
2018-05-09
페이지
236
출판사
푸른역사
설명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1841~1905)이 고종의 명에 따라, 미국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미국의 제도와 문물을 총 44개 항목으로 나눠 체계적으로 정리한 보고서 형식의 미국 견문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했던 박정양은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손꼽히는 실무형 개혁파 관료였다. 1887년 9월 조선 최초의 주미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떠날 때 고종은 그에게 미국 등 각국과의 친목 및 화호 도모 외에 '미국 정부와 인민의 정형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박정양은 미국에 머문 11개월 동안의 견문, 경험을 정리해 고종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비록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정부 요로의 관리들에게 읽혀 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대미 정책을 수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 '공식' 미국 탐구서였다. 바로 <미속습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