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화가들은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고 댓가를 받았을까. 당대에도 크게 인정받았던 화가들이 힘들게 생을 마감했다거나, 광통교에 골동이나 서화를 내다 파는 조그만 가게들이 있었다는 단편적인 정보로 재구성된 당시 화가들의 경제적 상황은 암담해서, 돈 많은 후원자들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작업에 임한 예술가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어렵다.
조선 후기에는 화원들이 모여서 밀린 그림 주문 건을 해결한 기록도 있고(“김홍도, 신한평, 김응환, 이인문, 한종일, 이종현 등 이름난 화사들이 중부동 감목관 강희언의 집에 모여서 공사간의 주문에 응했다”) 김홍도의 경우 고위관료, 규장각 각신, 중인층, 지방 토족, 미상의 인물 등 그야말로 각계 각층이 주문을 넣었으며, “최북의 집 앞에 사방에서 찾아와 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최북이 밀려드는 주문에 끝내 염증을 냈다”, “김홍도가 매화나무를 못 사고 있자, 어떤 이가 그림을 요청하는 예물로 돈 3천 전을 보냈다” 등으로 상황을 짐작하도록 돕는다.
한종유 <강세황 초상> 1781, 종이에 수묵담채, 55.0x35.7cm, 개인
강세황이 감독관으로 가 있으면서 아래 화원에게 그려달라고 해 받은 초상화
주문제작의 방법
그림을 그려달라고 할 때는 1) 직접 주문 방식(방문해 요청 or 숙식 제공 후 그림 받기), 2) 중개인 등 제3자를 통한 주문, 3) 서간을 통한 주문 방식을 통했다.
강세황은 어용도사 감동관으로 있으면서 규장각에 가서 화원에게 직접 부채 위에 자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명?)했다고 한 예 뿐만 아니라 누추한 화가의 집이나 작업실을 찾아가 그림을 요청한 예를 들어준다. 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숙식제공의 경우로 고양이를 잘 그린 변상벽 집앞에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힘써서 화가를 집으로 데려와 이틀을 머물게 해 고양이 그림을 얻었다는 문인의 기록도 있다. 이덕무도 부친의 생일 잔치를 위해 김홍도를 초청해 여러 그림들을 그리게 했다.
“윤재덕이 와서 최북의 그림 8첩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자신이 가첩 6장을 다시 부탁했다”고 쓴 일기 등으로 제 3자의 중개도 없지는 않았으나 예의 기록이 적다. 당시의 거래의 특징인지 양적으로 적어서 화상이 두텁게 존재할 여지가 적었는지는 이 논문을 통해 알기 어렵다.
직접 방문하지 않고 서간을 통해 이러이러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주문한 경우도 있었고(성대중이 김홍도에게. “연꽃 여러 대궁을 부서진 파초 잎 하나가 덮고 있는 그림” 주문), 진재해가 초상화를 그리면서 주문자에게 재료를 좀 구해달라고 쓴 편지도 전해진다.
진재해. <유수柳綏 초상> 1726년, 비단에 채색, 165.5×88.0cm, 경기도박물관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각종 재료는 모사하러 들어올 때 약간 가지고 온 것이 있으나 그 중 주홍 두 색분은 빼놓고 와서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감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색분 6~7가지나 혹 주홍분이 있으시면 곧 당홍이든 왜홍이든 간에 1돈만 이편에 부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보냈다.
주문제작의 양상
주문제작이 점차 늘어난 것은 현존 작품의 제발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경을 그린 산수, 사의산수, 고사인물, 신선, 화조영모, 화훼 등 각종 개인의 목적을 위해 그림이 주문됐다.
실경산수화는 권세 자랑을 위한 세거지 그림, 부임지나 금강산 같은 명승 유람 유행에 따른 것들이 매우 많다. 여행에 화가를 데려가기도 하고 정선의 금강산 그림 같은 알려진 도상은 비슷하게 베껴 그려 사용하기도 했다. 연구자는 이런 특정 이미지의 반복적 사용이 실경산수화의 대중적 소비와 유통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았다.
사의 산수화의 경우는 『개자원화전』 등 중국 화보의 유통 덕에 이런 식의 공급이 더 쉽다. 조선 후기 중국 문인화 중에 황공망과 예찬 양식이 많은데, 주문 대응에서 화보의 황공망과 예찬 도상이 중요하게 참고된 것과 관계가 깊을 것이라 시사하고 있다. 예찬 화풍을 토대로 한 주문제작된 작품 예로 이인문 <수간모옥도>, 이의성 <소림모옥도>, 김응환 <추수일모도> 등을 들었다. 예찬 화풍은 알다시피 먹을 위주로 간결하게 그리는 것이다. 빠른 시간에 완성할 수 있는 양식적 특성이 신속한 주문대응에 적합했다는 것인데, 나쁘게 말하면 주문 제작하는 것이니 대충 그리기 좋은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말과 다름 없어 보인다.
이 외에도 초상화에서의 예, 문인취향 고사인물화, 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신선도, 중인들의 시사 활동의 증가로 인한 아집도나 시회도 주문의 증가 등의 현상을 보여준다. 벽사, 길상용 그림의 민간 수요도 상당했고, 수요가 점차 확장되면서 평생도나 사녀도, 화조도의 주문 양상도 늘어났다. 소치 허련이 허모란이 되는 것처럼, 많은 주문에 반복적으로 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유명세가 형성되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주문이 많아서 모란으로 유명해졌다기보다 모란을 잘 그리니 주문이 많아진 것이기는 할 테지만 어쨌든 주문 카테고리도 수요층도 넓어지고, 양적으로도 증가하고 이러한 니즈가 주문제작의 방식으로 표출되던 상황이었던 듯하다.
근대기에 남은 흔적
화원 이한철은 1892년 “공무로 바빠 주문에 제때 응하지 못했음”을 한탄한 적이 있다. 이들의 경우 1894년 도화서가 폐지된 다음에는 주문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성실히 그에 임해야 했을 것이다.
“백은배는 매일같이 병풍을 만들어 달라 청하는 사람들의 요청에 응해 그림 그려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유숙에게) 집집마다 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 조르니 어쩌자는 말이냐” 등의 기록처럼 여전히 조선후기와 비슷한 상황이 말기에도 이어졌고, 유명 화가였던 허련은 신관호, 권돈인, 민영익의 집에 머물러 그림을 그리고 장승업 또한 이응헌의 집에서 기식하거나 역관 출신 한성판윤 변원규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며 작품을 쏟아냈다.
고람 전기는 약포를 운영하며 서화 중개를 일로 삼았는데 이를 근거로 (서화 중개업이 독립적으로 이뤄지지는 않더라도) 약포와 같이 인적 교류가 활발한 장소를 통해 상업화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광통교 육교 화방에서 장승업 등의 화가가 활동하는 등 어느 정도 회화의 유통 매매가 전개되는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주문과 제작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이어졌다. “~를 위해 그렸다”는 제문이 “~형의 부탁으로 그렸다”로 변화되는 경우가 많아서 화가가 다소 우위에 서고 능동적 결정이 이뤄진 것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조석진을 전속 화가로 고용하여 그림을 전문적으로 판매한다”는 한성서화관 광고(1908) 등의 존재는 화랑 같은 형태의 상업공간이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서화협회가 조직적으로 화가와 주문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는 기록들도 있다. 주문제작의 방식이 근대기까지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경제적 관점에서의 미술품 생산과 유통이 근대까지 의미 있는 발전을 하지 못했구나 싶기도 하다.
주문제작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근대까지 그 시각으로 확인해 가는 연구는 흥미로웠다. ‘이러이러하게 주문수요가 많았다’는 기록이 그저 화가의 영향력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하게 된다. 다만 유통 메커니즘이나 수요와 공급의 시스템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규모가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부족하나마 현존하는 자료를 통해서 다각도의 연구를 통해 추론해 낼 수 있는 최상의 재구성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