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선표, 「한국 개화기의 ‘풍경화’ 유입」,『미술사논단』Vol.52, 한국미술연구소, 2021.6, pp.101-131.
서양의 자연관을 반영하는 Landscape Painting의 일본어 번역 ‘풍경화(風景畵)’. 이 용어와 풍경화 그림의 유입 경로는 1) 외국인 화가들의 방문과 체재, 2) 대중매체에 사용된 이미지, 3) 신교육의 도화과목 등을 통해 이뤄졌다. 이렇게 슬금슬금 들어온 서양의 풍경화가 ‘서화’가 자리잡고 있던 한국미술에 융합되며 ‘회화’라는 장르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바로 그 시점의 양상을 종합한 글이다.
서양의 자연관을 반영하는 Landscape Painting의 일본어 번역 ‘풍경화(風景畵)’. 이 용어와 풍경화 그림의 유입 경로는 1) 외국인 화가들의 방문과 체재, 2) 대중매체에 사용된 이미지, 3) 신교육의 도화과목 등을 통해 이뤄졌다. 이렇게 슬금슬금 들어온 서양의 풍경화가 ‘서화’가 자리잡고 있던 한국미술에 융합되며 ‘회화’라는 장르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바로 그 시점의 양상을 종합한 글이다.
논문은 ‘풍경화’라는 용어가 발생되고 유입된 과정, 남대문 파노라마관에서 첫 서양 풍경화가 공개됐던 일, 한국에 온 외국인 화가(서양/일본)가 남긴 풍경화들, 풍경사진 대두 등의 상황을 차례로 짚는다. 지면상 ‘신교육과 사생강습’ 즉 근대적 교육을 통해 유입된 부분은 제외되었다고 밝히고 있어, 차후 이 주제에 대해 별도의 논문이 공개될 듯하다.
‘풍경화’ 용어의 발생과 유입
번역의 시대였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1872년 독일어 kunstgewerbe(공예)와 bildende Kunst(조형예술)의 번역어로 ‘미술’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을 시작으로 ‘회화’, ‘조각’, ‘공예’, ‘건축’ 과 같은 미술 분류의 신조어를 만들어내 사용하도록 했다. 한국에서는 1881년 신사유람단 견문록인 『일사집략』에 ‘미술’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으며, 1900년 전후로 미술, 회화 등의 어휘가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풍경화’ 용어의 등장은 1901년 연말, 황성신문에 게재된 사진관 광고에서 ‘신시대 미술의 풍속과 풍경화 엽서 발매’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말 일본의 서양문물 수용은 네덜란드를 그 통로로 시작했기에, 풍경화를 독립 장르로 발전시켜 온 네덜란드의 화법과 광학기구가 들어오고 번역서가 출간됐으며 난화(蘭畵) 계열이 붐을 일으켰다. 초기, 이를 수용하고 ‘풍경’이라는 용어를 기록에 남긴 대표적 인물은 시바 코간(司馬江漢, 1747-1818)이다. 저자는 ‘산수’화는 천지자연의 이치와 조화의 표상이고 탈속경으로 완상되던 대상이므로 지역의 실제 정경과 형상을 그린 것을 표현하는 데에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과, 기존 서화의 비사실성, 무용성을 비판하고 양풍화를 국용(國用)기예로 강조하던 시바 코간 등의 난화가들이 ‘풍경’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으리라고 짐작했다.
‘풍경화’는 1876년 개교한 일본 최초의 미술교육기관 공부(工部)미술학교 교수로 부임한 폰타네시(이탈리아 풍경화가)의 강의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풍경’ ‘풍경화’ 둘 다 통용되다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 1866-1924)가 1896년 결성한 ‘신파’의 백마회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통해 미술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 ‘풍경화’가 정착된다. 이것이 한국에 들어와 1901년~1902년 36회에 걸쳐 황성신문에 실린 대한제국의 경치 그림엽서를 파는 일본인 사진관의 광고에 ‘풍경화’ 용어가 쓰인 배경이 된다.
남대문 파노라마관의 첫 풍경화
조선 땅에서 일반에게 공개된 유화풍의 첫 서양풍경화는 1897년 도나파시스라는 서양 사람이 남대문통에 설치했던 “파노라마!!”라는 5전짜리 유료 쇼였다. 사람들은 길이 120미터가 넘는 거대한 그림을 360도 곡면으로 걸어 놓고 관객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구경했다고 한다. 내용은 유럽 도시들의 시내와 성곽 및 기타 장관. 1897년 5-7월에 독립신문에 있는 광고는 “아침 9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열려 있소”라고 끝맺고 있다.
독립신문 영자지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1897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파노라마!!"" 광고문안
같은 날 『독립신문』 광고
1788년에 발명된 파노라마는 활동사진이 대중화되기 전 유럽과 미국 대도시 시민들의 스펙터클 오락거리였고, 극사실풍으로 그려진 대형 파노라마 화상은 현실보다 더 박진감 있는 근대적 지각 형성 장치로 작용했다. 일본에서는 1890년에 개장, 열광적인 인기를 얻어 여러 곳에 만들어졌고, 이것이 한국에도 진출해 남대문통에서 두 달간 진행된 것이지만 얼마나 흥행했는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유럽 여러 도시 경관을 재현한 남대문통 파노라마관의 ‘각색 경치 그림’은 최초의 스펙터클한 시각문화이면서 일반에 첫 공개된 ‘풍경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최초의 옥내 공람시설이자, 관람시간을 공지한 최초의 선불제 입장료 관람장이기도 했다.
1915년에는 금강산도 파노라마 풍경화로 그려졌다. 총독부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물산공진회 흥행을 위해 양화가인 미야케 고키(三宅克己), 와다 잇카이(和田一海), 시부다 잇슈, 사토 후분 4명의 화가에게 금강산 사계 전경 4폭을 의뢰했다(세로 3.03m, 가로 5.45m). 미야케 고키는 독일의 극사실풍경화가의 영향을 받아 농채의 극사실 수채화가로 이름을 떨친 일본 수채화의 선구자였다. 이들이 그렸던 금강산도는 전해지지 않는데, 일본 관전인 제국미술전람회의 극사실풍 금강산도나 1920년대 초 김예식의 <금강산삼선암>과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공진회에는 50일간 116만 명이 입장했으며 관람기에 의하면 ‘5전을 내고 모형기차를 타면 주위 벽면에 철도 둘레 풍경을 나타내서 실제 기차를 타고 경관을 일람한 듯하다’고 했다.
방한 서양인 화가의 풍경화
영국군 장교 영허즈번드(F. E. Younghusband 1863-1942)는 서양인 최초로 백두산을 등정하고 천지를 풍경화로 그렸다. 아마추어지만 영국 외교관 헨리 제임스의 책 『장백산』(1888)에 원색으로 실릴 정도로 완성도가 있었다. 영국 해군 브라운(C. W. Browne)은 조선 풍경을 스케치했고, 병인양요에 참전한 프랑스 해군 앙리 쥐베르, 독일계 미국인 오페르트의 강화도 풍경 판화 등이 항해기나 신문의 삽도 등으로 실린 적이 있다.
프란시스 에드워드 영허즈번드 <백두산 천지> 1886 『장백산』전거
개항 이후 1880~1899년 20년간 한국을 다녀갔거나 거류한 서양인은 선교사만 500명이었고 여기에 외교관, 상인, 여행자 등이 더 있었다. 이 중 몇몇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삽화로 제작하기도 했고, 아마추어 인류학자인 새비지 랜더(Arnold H. Savage Landor, 1867-1924)는 최초로 한국의 경관을 풍경화로 남기고 저서 『코리아 또는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95) 안에 이것을 남겼다. 그 책 안에 수록된 랜더의 유화 <남산>은 흑백도판으로만 전하지만, 최초의 한국 풍경 유화로 알려진 휴버트 보스의 <서울 풍경>보다 8년 앞선 것이다.
새비지 랜더 <남산> 『코리아 또는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전거
가장 잘 알려진 방한 서양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파리 살롱전 등의 수상 경력이 있고 미술단체를 조직한 적도 있는 프로 화가로 미국에 귀화했다. 1900년 파리박람회 전시 작품 제작을 위해 서울에 왔다가 두 달 정도 체류한 것으로 보인다. 신혼여행을 겸해 각국의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동아시아 일주 중 중국을 거쳐 서울에 들렀고, 방한 기간 중 고종황제의 초상을 그려 파리만국박람회 미국관에 전시됐다. 초상화가지만 브뤼셀에서는 풍경화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서울 풍경>은 현존하는 최초의 한국 풍경 유화다.
휴버트 보스 <서울 풍경> 캔버스에 유채, 31x69cm 국립현대미술관
정동 언덕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새문안 주변 기와집이 묘사되고 원경으로 인왕산 북악산 경복궁이 보인다.
이 외에 1904년의 독일 식품가공회사 광고카드에 제물포 풍경(작자미상)이 있고, 프랑스 세브르요업소 기사 레오폴드 레미옹이 서울에 체류하며 유화와 수채화를 그렸다. 당시 관립한성법어(프랑스어) 학생이던 고희동이 레미옹의 스케치 장면을 보았고 서양화 전공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엘리자베스 키스가 일제강점기에 내한해 채색판화와 수채화로 조선의 풍경과 풍물을 제작하고 전시회도 가졌다.
내한 일본인 화가의 풍경화
1894년 청일전쟁 때 메이지미술회 회원들, 즉 창설자인 고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郞)와 아사이 추(淺井忠), 야마모토 호스이(山本芳翠), 도죠 쇼타로, 가메이 시이치, 이시카와 긴이치로 등이 한국에 왔다. 구로다 세이키도 프랑스 잡지의 통신원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다. 이들은 전쟁터가 된 한반도와 만주 등의 실상을 전쟁화로 제작해 국가에 바치거나 전람회에 출품했다. (ex. 도죠 쇼타로 <평양포위 공격도> <황해격전대파노라마도>, 고야마 쇼타로 <평양전투> <일청전쟁여순공격도> 등) 고야마, 아사이 추, 야마모토 호스이 등은 평양에서 사생 활동도 했다.
아사이 추 <대동강 연광정> 1894 종이에 수채, 21.2x33.2cm
수채화가 미야케 고키는 청일전쟁에 징병된 것으로 틈틈이 풍경을 그렸는데 <조선경성시가>(도쿠시마현립근대미술관) 등은 그의 자서전에도 실었다. 일본화가인 사이고 고게츠는 전쟁기록화 제작을 위해 내한했다가 종전되어 서울 등지 사생을 하고 귀국 후 <조선풍속>(1896, 도쿄예술대 미술관) 등을 그렸다.
1904년 러일전쟁 때도 전쟁을 위해 화가들이 한반도에 왔지만, 이때는 사생을 남긴 화가가 드물다. 청일전쟁 때 왔던 도죠 쇼타로가 향토경을 다룬 <한국풍물>을 그려 『미술신보』 4-5호에 수록되었다. 고스기 미세이는 잡지 통신원으로 전쟁 삽화와 작은 경치 등을 그려 본사에 보냈다.
이후 통감부 시기와 일제강점 초기에는 후지시마 다케지 등이 사생을 위해 내한하고, 도화 교사나 신문 연재 삽화가로 와서 거주하며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야마시타 히토시, 츠루다 고로, 마에카와 센판 등이 당시 신문사에서 일하던 삽화가들이다. 1914년 매일신보에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 풍경화가 요시다 히로시(吉田博), 이시카와 도라지(石川寅治) 등의 작품사진이 실렸다.
풍경사진의 복제와 유포
개화기의 풍경화 유입 양상과 함께 풍경사진의 수용 양상도 길게 다루었다. 동아시아에 사진이 파급된 것은 1840년대이고, 우리나라는 1882년경 수용되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산수화를 즐겨 그렸던 황철(1864-1930)로 그는 상하이에 갔다가 사진술을 배워 왔다. 사진술에 관심이 많았어도 그의 산수화는 사진의 영향은 전혀 받지 않았고 전통 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운영(1852-1935)도 마찬가지.
황철 <돈의문 부근> 사진(위), 하야시 다케이치 <서대문 앞> 사진 『조선국 진경』 전거
1890년대 후반부터는 국내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었는데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진관들이 여러 신문에 광고를 낸 역할이 컸다.
경성 옥천당 사진관 광고. “서양 신시대 미술의 풍속경치사진(엽서)”
이 옥천당 사진관 주인의 스승은 일본의 대표적 사진작가 오가다 가즈마사로, 그는 미국에서 사진 촬영술을 배워왔다.
일본에서 엽서(회엽서)가 유행하며 조선에서도 인기를 끌어 시각문화 컨텐츠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1898년 대한제국의 농상공부에 초빙된 프랑스인 클레망세가 사진엽서 발행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고, 1901년 충무로에 히노데(日之出) 상행 등 본격적인 사진엽서 제작소들이 생긴다. 자연풍경보다는 명승고적이 중심이 되었으며 ‘신내지’라 했던 조선 관광의 장려와 밀착되어 활성화된다. 여행안내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도쿠다 도미지로의 『조선금강산사진첩』은 14년간 12판이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대중매체에서 사진이 대량으로 복제되어 유포된 것 또한 시각문화의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1890년 시간당 2-3만 장을 찍어내는 윤전기 도입으로 인쇄된 사진이 게재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1901년 『그리스도신문』에서 최초로 사진화보를 게재했다. 각종 인쇄물로 복제된 풍경사진은 주로 명소와 고적을 중심으로 1890년대부터 등장했고 이의 영향이 풍경화의 주제의식, 재현방식 등에도 작용하여 근대 창작 풍경화의 제재나 구도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제국 일본의 ‘신내지’ 영토가 된 한반도의 경관을 타자의 시선으로 편성한 풍경사진이 취미의 고취 외에 식민지 근대화 등의 도구로 쓰였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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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전후 개화기 한국에 ‘풍경화’가 유입되면서 천년 이상 내려온 산수화를 통해 경관을 표현하던 시각예술이 근대화를 ‘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1910년대 최초의 서양화가가 등장하고 풍경화도 자연스레 본격화되면서 ‘동양화’라는 카테고리로 다시 묶인 산수화가 새롭게 전개되는 계기가 된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초기, 몇 가지 루트로 한반도 내에 ‘풍경화’ 용어와 개념, 풍경을 다룬 근대적 시각예술이 수용되는 과정이 서술되었는데 양상의 종합에서 크게 나아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