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한, 「조선시대 官窯의 명칭과 성격 재검토」, 『미술사학연구』(한국미술사학회), Vol. 308, 2020.12, pp.145-171.
조선시대, 일반 지방 가마에서 생산된 백자와 ‘분원’ 산 백자는 질적으로 차이가 많다. 분원은 왕실과 중앙 관청용 도자를 생산하던 관요에 해당하므로 ‘분원산’이라는 명칭 자체가 일정 품질의 도자를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 ‘분원’이라는 용어 사용이나 관요를 보는 시각에 연구자들마다 차이가 있어 문제가 생겨남을 지적하고, 조선시대 관요를 가리키던 명칭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고 그 성격은 어떠했는지 정리할 필요에 의해 나온 논문이다.
조선시대, 일반 지방 가마에서 생산된 백자와 ‘분원’ 산 백자는 질적으로 차이가 많다. 분원은 왕실과 중앙 관청용 도자를 생산하던 관요에 해당하므로 ‘분원산’이라는 명칭 자체가 일정 품질의 도자를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 ‘분원’이라는 용어 사용이나 관요를 보는 시각에 연구자들마다 차이가 있어 문제가 생겨남을 지적하고, 조선시대 관요를 가리키던 명칭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고 그 성격은 어떠했는지 정리할 필요에 의해 나온 논문이다.
15세기 조선은 왕실/관청용 그릇생산 제조장을 마련했다. 1467년 경기도 광주목에 가마가 설치되어 수 백명의 사기장들이 그릇을 생산했다. 국가 주체로 도자를 생산했으니 이곳을 관요라 지칭할 수 있다. 이 광주목의 관요는 15-16세기 문헌에 ‘사옹원 사기소’로 기록되었다. (사옹원은 왕실의 음식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1625년의 기록부터는 사옹원의 분사라는 의미에서 ‘분원’으로 기록되어 학계에서는 이 사옹원 사기소를 ‘분원’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최근 도자 연구에서는 17세기 이후의 분원과 15-16세기의 관요를 구별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즉 첫 번째 주장은 ‘사옹원 사기소는 관요이지만 조선후기 분원과는 다른 것’(분원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이라는 시각이고 두 번째 주장은 ‘사옹원 사기소는 (근본적으로) 분원’이라고 여기는 시각이어서 대립 상황이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연구는 사옹원에서 어기(御器)를 만들기 위해 광주목에 분사를 설치한 것이라 판단하고 사옹원 사기소를 분원으로 판단하는 2)번에 논지를 보태는 역할을 한다.
연구자는 이를 위해 관요의 성격에 대한 논쟁 정리, 시기에 따른 관요 지칭 용어를 포함한 관요의 위상에 대한 사료와 연구를 정리하고, 분원 용어의 의미도 검토한다.
초기의 관요 연구에서는 대체로 사옹원 사기소를 분원으로 인식했었고 의문이 제기된 시점은 2008년, 1625년의 기사에 (처음) 등장하는 ‘분원’을 15세기까지 소급해서 적용하기 어려우니 사옹원 사기소를 분원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다. 또, 15-16세기 사옹원 사기소에는 ‘상시직’ 관리가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의 정식조직에 편입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2014년 박정민).
기록을 살펴보면 관요를 지칭하는 ‘분원’이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697년에, 승정원일기에서는 1625년에 처음 등장한다. 사옹원에서 지방에 위치한 가마-자기소를 지정해 관리를 파견해 관리하고 백자를 공급받는 긴 기간 동안 조선시대 문헌에서 관요를 지칭하는 용어는 사기소, 자기소, 번조소, 분원, 분사옹원, 외원, 관요 등으로 매우 다양했고 특별한 구분 없이 동시기에 혼용됐다. 굳이 분원으로 통일해 부르지 않았을 뿐 기록에서 가리키는 사기소는 사옹원이 광주목에 설치한 분원을 의미하는 것이니 15세기 광주목의 그곳을 분원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상시직 항관이 파견되었는지의 여부로 분원이라 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는 17세기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당시 광주 출장 관원들이 2월에 내려가 6월에 백자를 가지고 오는 조가 있고, 6월에 내려가 10월에 복귀하는 조가 있었다. 일년 열두달 그곳에서 근무한 관원은 없다고 해도 관요 업무가 어차피 음력 11월 종료되면 다음해 1월까지 있을 이유가 없으니 (항관은 없다해도) 중앙에서 상시관리 된 것이고 그 때 승정원일기에도 관리가 봄가을로 파견된 관요를 수없이 ‘분원’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15-16세기 사옹원 사기소와 17세기 분원은 운영체계상 큰 변화가 없는데 17세기 왕실이 분조, 왕실 유지를 위한 조직 분리라는 인식으로 분원이라는 용어가 재정립된 것으로 추정한 연구가 있기도 했다. 17세기 이후에는 분원이라는 명칭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고려시대부터 물품 생산 장소를 물품명+소의 합성어로 불렀고(은소, 지소, 사기소, 자기소 등) 조선 초 각 지방에 사기소가 흩어져 있어 ‘횡천 사기소’ 같이 지명을 붙여 기록했다. 관요가 세워지면서 중앙 관청, 왕실용 그릇은 관요에 집중되기 시작했으니 처음에는 관요도 자연스럽게 사기소로 불렸을 것이다. 즉 관요였던 사옹원 사기소를 당대에 뭐라고 불렀든 그것이 분원(성격) 인지 아닌지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일반적 기준으로는 본사(本司)가 있고 해당 업무를 별도의 장소에서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본사와 같은 조직과 기능을 가진 관부를 따로 둔 분사(分司)를 만드는 것이나, 조선시대는 본사 담당 분야 중 특정 분야 분담을 위한 분사도 다수 확인된다. ‘본원’이 있어야 ‘분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사옹원 분원은 사옹원에 소속된 분사를 포괄하는 용어다. 논문은 본원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등장하기 전에도 박상(1474-1530)이라는 사람이 남긴 시 등에서 광주목에 사옹원 분원(분사)가 등장하는 예를 들어 그 때의 정황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한다.
* ‘분사옹원 직장 권행’과의 인연과 헤어짐의 아쉬움, 관요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사옹원에서 광주목에 1520년대 이전에 분사를 설치했음을 유추한다. 예를 들어 身出禁中分內院 이라는 대목을 예전에는 ‘몸은 궁궐의 분내원에서 나와’로 해석해서 궁궐 안에 분내원이 있고 광주의 관요(분사옹원)에 번조관을 보낸 것으로 봤으나 연구자는 ‘몸은 궁궐의 내원(사옹원)에서 나뉘어(분사되어) 나와’로 풀이했다. 사옹원은 궁궐 안에 있는 내원[사옹원·본원]과 밖에 있는 외원[외사옹원·분원]으로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관요도 외원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白磁 靑畵梅竹文 立壺) 높이 41㎝ 리움 소장 국보 219호
15세기 중엽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
그 당시 광주목의 관요는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광주목사는 사옹원 사기소의 중요 사안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등, 광주목사가 관요에 관여하였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록이 불완전하지만 이 광주목의 사기소(분원)은 사옹원의 관리 하에 있었고 그렇다면 처음부터 분원의 성격이 명확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떨어진 위치일 수밖에 없는 가마에 분원을 두는 것은 자연스럽고, 매년 사옹원 소속 관원을 파견한 기록이 있으며, 1466년 사료에 380명의 사기장이 사옹원의 경공장으로 기록된 것, 1493년 사옹원 제조가 사옹원 사기소의 시장(柴場 땔나무공급지) 결정 자리에 참석한 기록 등을 분원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로 들었다. 사옹원이 관요를 운영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땔감, 백토, 사기장을 직접 관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업무는 17세기 관요가 분원으로 불리던 때와 동일하다. 따라서 15∼16세기 사옹원에서 관요에 관원을 파견하였으나 사옹원의 분원은 아니라고 추정한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요의 설치는 조선시대 도자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아직까지 15∼16세기 관요의 성격은 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상태다. 처음부터 관요가 사옹원의 분원이었는지, 아니면 도중에 성격이 변화되어 사옹원의 분원이 되었는지가 논쟁의 중심이었는데, 최근 15~16세기 사옹원 사기소와 17세기 이후의 분원의 성격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광주목 관요는 처음부터 사옹원의 분사로 성립되었으리라 추정하고, 명칭을 바탕으로 사기소와 분원을 구분하려는 견해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거기에 늦어도 1520년대 이전에는 사옹원에서 광주목에 분원을 설치했던 것이 확실함을 증명하고, 그 이전의 상황을 1467년경까지 소급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검토가 요구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