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행가, 「근대 남성의 몸 만들기와 미술해부학적 지식 - 이쾌대의 <미술해부학 노트>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 40, 2020.12, pp. 169-206.
이쾌대가 남긴 <미술해부학 노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을 때 그곳에서 만난 어린 친구에게 인체 그리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미술해부학 노트>는 그가 일본 유학기에 얻은 해부학적 지식과 이후 경험에서 걸러진 기억으로 만든 결과물로 해부학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이쾌대가 <군상> 연작 등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인체 표현에 대해 천착했던 바를 엿볼 수 있어 중요하다.
이쾌대가 남긴 <미술해부학 노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을 때 그곳에서 만난 어린 친구에게 인체 그리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미술해부학 노트>는 그가 일본 유학기에 얻은 해부학적 지식과 이후 경험에서 걸러진 기억으로 만든 결과물로 해부학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이쾌대가 <군상> 연작 등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인체 표현에 대해 천착했던 바를 엿볼 수 있어 중요하다.
이 논문은 이쾌대가 습득했던 근대 일본 미술해부학의 성격, 일본 미술해부학의 근거인 프랑스 미술해부학의 특징을 살피고, 이쾌대가 들었던 니시다 마사아키(西田正秋 1901-1988)의 미술해부학 강의, 이쾌대 개인의 경험 등이 <미술해부학 노트>와 작품에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추적한다.
미술해부학 수업에 대한 기억
이쾌대는 1933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면서 미술해부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 시기,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 이전까지 동경 유학을 갔던 한국 작가들의 미술해부학 지식은 대부분 주요 미술학교에 출강했던 니시다 마사아키를 통해 습득했다고 볼 수 있다. 유학파 작가들이 니시다의 해부학 수업이 유학시절 가장 인상 깊은 수업이었다고 할 정도로 인체 구조를 다루는 의학에서의 해부학과는 다른 '미의 해부학'으로 특별했다고 말한다. 안면 생김새를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성인과 아동 등으로 나누어 조형적 특징을 분석하고 고전에서 현대까지 동서양 미술작품을 비교해가면서 미적 특질을 해부학적으로 분석하는 수업이었다고 한다. 일본 미술대학/학교에서의 니시다의 수업이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등을 통해 해방 후 한국의 미술교육 체제 속에 자리잡은 흔적을 보여준다.
일본 근대 미술해부학의 도입
일본 미술교육에 미술해부학이 도입된 것은 1880년대로, 독일에서 위생학을 전공하고 온 모리오 가이 이후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 유학을 다녀 온 서양화가 구메 게이치로로 이어졌고 그 이후 구메의 제자 니시다가 미술해부학 수업을 넘겨받았다. 즉 니시다의 미술해부학 지식의 근거는 프랑스 19세기 미술해부학이라고 볼 수 있다.
구메가 배운 마티아스 뒤발은 (미술에서) 해부학의 목적이 인체의 움직임과 외적 형태에 대한 파악이기 때문에 사체 뿐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동작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발은 포즈를 취한 해골을 그리는 해부학 수업 대신 실제 남성 누드를 관찰하여 외적 형태 속에 드러나는 근육과 뼈의 구조를 분석하도록 했다. 교재도 몸의 기관 중 외적으로 발현되는 운동기관과 눈코입귀 등의 표현 근육을 주로 다루었다.
<안면각 측정(두골 각도 측정기)>
연구자는 니시다에 이어 이쾌대의 해부학노트에까지 나타나는 안면각(Facial Angle)에 대한 내용을 주목한다. 18세기 네덜란드 의사 캠퍼(Petrus Camper)는 유인원의 두개골을 수집하고 여러 인종과 고전 조각의 두상과 비교하여 각각의 안면각을 분석한 바 있었다. (그의 이론은 19세기 이후 인종학에 이용됐다.) 뒤발의 미술해부학에서는 또한 안면 근육과 표정의 관계 유형화 등 감정 표현에 대한 연구들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전기 실험을 근거로 안면 근육과 표정의 관계를 유형화해 제시하기도 했다.
<입술의 삼각형 근육(불만, 경멸의 표정)>, <불만 경멸의 표정 도해>
뒤발에 이은 해부학교수 폴 리체는 히스테리 환자의 몸에서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 하에 환자들의 몸 사진을 찍어 방대한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한 병리학자 샤르코의 제자였다. 리체는 뒤발의 연구를 진전시켜 인체 동작에 대한 형태학적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는 남녀 모델을 고용하여 유형별로 각종 동작, 고대 조각의 자세 등을 취하게 하여 사진으로 촬영했다. 해부학적 통계를 모아 비교인류학적 연구를 위한 데이터를 만들고 인체측정을 위한 표준 리스트를 작성해 유형 체계를 만들었다.
폴 리체 <남성형태학> 1890
폴 리체 <상반신의 운동: 옆으로 기울기 전면>
1890년 그가 출간한 미술해부학서는 르누아르, 브라크, 드가 같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이후 20세기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을 거쳐 한국 미술해부학서의 전범이 된다.
니시다 마사아키의 미술해부학, 인체미학
일본이 유럽의 미술해부학 지식을 수용했음에도 니시다 마사아키가 일본에서 미술해부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것은 일본인의 인체미를 서양과 비교분석하는 일명 ‘응용해부학’ 또는 ‘인체미학’ 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쾌대가 수업을 받았던 당시 쓰여진 니시다의 『미술해부학개론』은 서양 고대부터 19세기까지 미술해부학의 역사를 다룬 부분과, 인체 구조(해부학 기초), 동세에 따른 표현효과 부분으로 나뉜다. 니시다는 이 책에서 자신의 미술해부학에 대한 개념 즉 “인체에 대한 형태로 동세 표현을 탐구하고 아울러 어떻게 미적 효과를 낼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종의 인체미학” 임을 제시한다. 연구자는 동세를 강조한 미술해부학이라는 점은 프랑스 미술해부학에서 계승된 것이고, 인체미학을 강조한 것은 일본적 응용에 해당한 것으로 보았다. 니시다는 해부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예술작품의 미적 효과를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 일본인들의 패션, 육체미를 만들어나가는 데도 응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의 자태미’, ‘안경의 미학’, ‘치아의 미’ 등 일본인의 몸 담론으로 확장시킨다.
『미술해부학개론』의 서술은 기초론과 응용론으로 나뉜다. 예를 들면 기초론에서는 인체의 운동 종류와 운동에 관여하는 뼈의 구조를 다루고, 응용론에서는 경추가 앞으로 기울어지는 전굴 자세는 소극적, 수동적, 보수적 표정효과와 함께 피로/병약/노쇠(생리적), 비탄/의기소침(심리적), 겸손/복종/정숙(정신적) 등을 나타낸다는 식이다. 각 부분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밀레의 <만종> 등 유명한 작품으로 설명하는 것을 포함시켰다.
그의 책에는 리체의 도해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서양인과 비율이 비슷한 동양인(인도인)을 고용해 리체의 사진작업을 따라하기도 했다. 머리의 형태 논의에서는 지역, 환경, 시대, 인종에 따라 다른 미를 인정해야 함도 강조했다. 안면각이나 두개골의 형태 차이가 지능의 차이가 아니라는 주장을 깔고 있는데, 일본이 메이지시기 이래 서구 중심주의에 대해 강한 대항의식을 가지고 서구인들이 만들어 놓은 우열의 기준을 넘어서고자 했던 것의 연장이다. 서양인과 일본인의 차이는 인정하되 그것이 우열이 아니라 습관 풍토 환경의 후천적 요인을 강조하는 시각이 니시다의 논고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니시다는 1930년대 후반 전쟁기 건강한 국민만들기 담론과 맞춰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육체미로 의학적으로 건강하고 시대정신에 맞는 건전한 육체미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썼다. 가령 코가 낮은 것은 노력으로 불가능하니 개량할 여지가 없으나 흉곽의 두께가 얇은 것은 빈약하니 입체적으로 발달시켜야 한다는 등이다.
19세기 프랑스 미술해부학 지식이 일본화된 것을 받아들였던 이쾌대 등 한국의 미술가들의 미술해부학 지식은 인류학, 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 우생학 담론 등과 밀접하게 결부되었음을 지적한다.
이쾌대의 <미술해부학 노트>
이쾌대는 1951년 수용소에서 만난 미술에 관심이 있던 17세의 이주영에게 인체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미술해부학노트>를 제작했다. 총 38페이지로 연필로 내용을 기록했으며 전신비례에서 시작, 골격 근육 명칭과 역할, 안면의 구조와 표현효과 등의 순서로 기록됐다.
니시다의 『미술해부학 개론』과 이쾌대의 노트를 비교하면 총론에서 각론으로 진행되는 순서 등에서 유사하지만 이쾌대의 노트가 훨씬 단순화된 정보를 담고 있고 동작을 다룬 부분은 적고 안면에 집중된 부분이 많다. 동양인은 6-6.5등신, 서양인은 6.5-7등신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니시다가 서양인은 7.5, 일본인은 7등신으로 제시한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기억 착오인지 실제를 반영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쾌대가 그린 인물 중에는 7등신이 많다.
이쾌대는 안면각의 차이를 진화발전의 차이로 보고 안면각이 클수록 고귀한 인상을 준다는 니시다 식의 표현을 쓰면서도 안면각이 지능의 발달 정도와는 차이가 없다고 하는 등의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이쾌대가 집중하고 있는 안면부분의 서술은 근육의 움직임이 아닌 관상학적 정적 요소를 다루어서, 눈, 코, 입, 귀 등을 모두 형태적 유형에 따른 표현 효과를 강조했다. 타원형의 귀는 원만한 성격, 각도가 급격한 귀는 신경질적, 두터운 입술은 미개 또는 열정, 얇은 입술은 냉정 또는 경박 등으로 니시다의 서술에 한국인 관습 속의 인상이 결합된 것이다. 이쾌대가 작품에서 구체적이고 섬세한 이목구비의 묘사로 성격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운명>, <상황>, <군상4>에 이르기까지 이쾌대의 인물은 비슷한 시기 다른 화가들과 달리 이목구비의 골상적 특성이 분명하고 눈동자 위치까지 또렷하게 표현된다.
이쾌대 <상황> 1938, 156x128cm, 천에 유채, 개인
이쾌대 <군상4> 1948, 216x177cm, 천에 유채, 개인
이쾌대의 <군상>과 근육질의 남성 누드 : 근대 남성의 몸
이쾌대의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이 드러난 <군상4>가 발표되었을 때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좌파적 입장에서는 관념적 그림이고 모더니스트 입장에서는 폐기된 과거의 수법이라 여겨졌다. 한국인들이 처한 현실과 서구인 체격의 누드 군상의 불일치는 이쾌대의 한계로 읽히곤 했다. 그러나 연구자는 그가 해부학적 관심이 남달랐던 점과 인체에 천착했던 이유를 살펴보면서 작품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군상4>는 남성의 몸 형태가 잘 드러나게 묘사되어 있다. 여성이나 소년도 성인 남성처럼 묘사했다. 안면각은 80도 전후(소위 고상한 인상)에 가깝고 눈은 외꺼풀이다(다른 작품과 차이). 화면 우측 인물들은 안면과 눈동자가 아래로 향해 절망, 낙담, 비참 등의 감정을, 좌측으로 갈수록 정면 응시로 의지, 단호 등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쾌대 자신은 역도, 야구, 유도, 기계체도 등의 선수로 활동한 스포츠맨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와서 『현대체력증진법』 등을 써낸 휘문고보 체육교사 서상천의 영향이 있었을 것임을 제시하고, 서상천의 저서에 이쾌대의 형인 이여성, 정치적 방향이 같은 여운형 같은 사람들의 상반신 누드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는 점을 들면서 ‘단련된 서구적 남성의 인체가 곧 조국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영웅의 상이자 양성해야 할 실력’이었던 당시의 시각을 환기시킨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이쾌대에게 근육질의 남성의 몸은 단순히 서구적 이상미가 아니라 현실에서 요구된 만들어져야 하는 몸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군상4>의 인물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은 아니지만 이쾌대가 좌절에서 희망으로의 서사 구조를 가진 이 작품에서 해부학적 표현 효과를 최대한 사용하면서 (미술해부학적 지식을 토대로) 단련을 통해 만들어져야 하는 한국 남성의 이상화된 모델을 제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근육질의 남성 육체가 나타난 것은 급작스럽거나 단순한 미술해부학적 지식 도해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 동안 가시화되어야 했던 새로운 ‘국민의 몸’이며 타자화되어 온 근대인의 몸이라는 측면을 재고하고자 한 논문이다.
근대기 한국에 수용된 미술해부학 지식의 계보와 인체를 둘러싼 담론화의 양상을 이쾌대의 노트와 일정 작품을 통해 고찰했는데 그렇기에 근대기 작가들이 누드 모델이나 미술해부학 저서를 통해 얻는 지식과 그 영향에 대한 전반적 시각을 제공하지는 않고 있다. 수입되거나 내면화된 근대 화가들의 인체에 대한 시각과 담론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과 함께 살펴보는 연구로 확장될 수 있겠다.